F.A.

2023년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가 있다. 바로 성능경(1944-)이다. 평생 작품 활동을 해 온 성능경은 그의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던 탓에 개인전을 한 횟수가 총 5번에 불과하다. 그러나 2023년에만 5번의 전시가 개최된다고 하니, 그가 뒤늦게 주목받은 이유가 궁금해진다.

 

성능경은 단색화가 국내 화단을 지배하던 1970년대 초, 전위적인 실험미술을 통해 변화를 모색했던 대표 작가 중 하나다. 가장 최근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한국 실험미술 1960-1970》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라는 제목으로 순회전이 열리고 있다. 성능경을 비롯해 1960-70년대 활동한 한국의 실험미술가들이 우리의 미술을 세계 미술의 맥락 안으로 편입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만큼, 이번 순회전은 한국의 실험미술이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현재 성능경의 작품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2023. 8. 23. ~ 10. 8.)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시 제목인 망친 예술과 행각은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생각의 틈새를 제시하려는 성능경의 예술관을 응축한 키워드다. 성능경은 평생 비주류의 태도를 고수하며 자기 작품을 망친 예술로 명명함으로써 전통적인 예술에 의문을 던져왔다. 또한 인간 삶의 조건을 향해 질문하는 행각(퍼포먼스)을 오늘날까지 실천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 전반을 잘 아우르고 있는 타이틀이라고 생각된다.

성능경의 예술을 해석하는 주요 키워드로는 개념미술과 행위예술이 꼽힌다. 그의 작품을 참여미술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보다는 개념과 행위에 집중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의 예술세계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ST(Space&Time)라는 그룹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ST는 AG(한국아방가르드협회)와 함께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계를 이끈 그룹으로,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개념미술에 주목해 작품 활동을 펴나갔다. ST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이건용이 있지만, 성능경 또한 ST에서 작품을 지속해서 발표하며 9년여간 함께 활동했다.

 

성능경은 제2회 《ST》 전에 <상태성>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철판을 휘게 하여 벽에 기대놓고 양쪽에 커다란 돌을 놓아둔 작품이다. 하지만 전시장을 찾은 누군가가 “저게 상태성이래”라고 말하며 피식 웃고 지나갔다고 한다. 작가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앞으로 입체 미술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회고한다. 자신도 이우환의 <관계항> 작품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밝히기도 했는데, 오히려 이러한 일화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을 해나가는 계기가 된 듯하다.

성능경, <신문읽기>, 1976. Ⓒ 국립현대미술관
성능경, <특정인과 관련 없음 1>, 1977. Ⓒ 국립현대미술관

작은 목소리가 모여 거대한 메시지로, 신문 작업

성능경을 대표하는 작업으로는 <신문읽기>가 있다. 본격적으로 <신문읽기> 작업을 하기 전인 1974년 제3회 《ST》 전에서 그는 <신문: 1974.6.1. 이후>를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전시 기간 해당 날짜의 신문을 면도날로 오리는 반복적 행위를 보여준다. 그는 6월 초하루부터 시작해 전시가 끝나는 날까지 매일 신문을 오리는 작업을 지속했다. 4개의 패널과 두 개의 투명 아크릴 통을 놓고 일간신문의 2면 1장씩 총 8면을 패널에 부착한 다음, 매일같이 면도칼로 기사란의 활자들만을 오려내는 작업이었다. 잘라낸 기사 부분은 반투명 청색 아크릴 통에, 광고와 만화, 사진을 포함한 여백 부분은 투명한 아크릴 통에 따로 쌓아놓았다.

 

유신 정권 시절이었던 당시, 성능경은 모기만한 목소리라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러한 작업을 지속했다고 밝혔다. 역사에 정직하자라는 일념으로 유신 시대 언론 탄압에 대해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당시 신문은 이미 한 차례 당국에 의해 검열되고 있었는데, 작가는 통제되는 언론의 기사를 다시 한번 검열한다는 의미에서 기사를 오려내는 행위를 지속했다. 현실의 사건과 편집된 정보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신문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유신 정권의 언론 탄압 실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이었다.

 

“1970년대에는 모든 것에 제약이 많아서 조금이라도 말실수하면 구속되기도 하는 세상이었다. 그런 시대 상황 속에서 당시의 나는 침묵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의 모순에 대해 발언하고 싶었다.”

– 성능경 –

 

하루는 신문을 오리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쳤다고 한다. 1974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비방하는 일체 행위를 금지한 해였다. 성능경은 너무 놀라 이제 잡혀가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경향신문 기자가 인터뷰 좀 하자고 요청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신문을 오리느라 손이 벌벌 떨렸는데, 인터뷰해서 신문에 날 생각을 하니 겁이 나서 “시간 없다” 하고선 얼른 신문을 오리고 도망갔다고 한다. 당시 작업을 보면 하도 빨리 오리고 도망가서 삐뚤빼뚤한 흔적이 남아있다.

 

성능경의 이러한 작업은 <신문읽기>로 연결된다. <신문읽기>는 신문을 소리 내어 읽고 그 부분을 면도날로 오려내는, 성능경의 대표적인 퍼포먼스 작업 중 하나다. 위의 작업이 신문을 오려내는 작업이었다면, <신문읽기>에는 소리 내어 읽는 행위성이 추가되었다. 지금에야 신문을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당시만 해도 신문은 제4의 권력이라 불릴 만큼 특권을 지닌 매체였다. 성능경이 면도날로 신문을 오려내는 것은 단지 종이를 오려내는 행위가 아닌, 신문이 강제하고 있는 기호들을 해체하는 행위로 봐야 한다. 성능경은 신문을 읽고 오려내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신문이 강제하는 맥락을 해체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맥락을 내세웠다.

 

<8면의 신문> 또한 신문의 문맥과 의미를 말소시키는 작업이다. 작가는 8면의 신문을 1면당 32면으로 잘라 확대 복사하여 256면을 만들고 이것을 무작위로 섞어 8개의 섹션으로 만들었다. 그다음 고유명사와 명사만 알루미늄 테이프로 붙여 문맥을 뒤섞었다. 이는 신문의 편집 기능을 흉내 내면서 신문의 기능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과정이 된다.

 

성능경은 사진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그는 1974년 사진 작업을 결심하고 중고 니콘 F2 카메라를 구입해 독학으로 사진술을 익혔다. <특정인과 관련 없음 1>은 신문에 실린 얼굴 사진을 접사로 촬영한 후 필름을 인화한 작품이다. 그런데 인화된 사진의 눈 부위에 노란색 띠가 부착돼 있다. 예전에는 뉴스 기사에서 범죄자를 보도할 때 검은색 띠로 눈을 가리곤 했다.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취지지만 사실 검은색 띠가 있다는 것은 범죄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검은색 띠가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신문 편집자의 판단에 따르는데, 성능경은 이러한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특정인과 관련 없음 1>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노란색 띠를 붙임으로써 좋고 나쁨의 기준을 무너뜨렸다.

성능경, <위치>, 1976. Ⓒ 직접 촬영

80년대 이후 작업물들

성능경은 1982, 1983, 1984년이 자신에게 경력의 공백기라고 말한다. 1970년대는 모더니즘 계열에서 소외됐었고, 1980년대는 민중미술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자신은 너무 온건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3년의 공백을 가졌을 때 그는 “내가 소외되는구나. 소외되는 정도가 아니라 소멸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전을 열기로 다짐한다.

 

그는 1985년 관훈미술관에서 <현장> 시리즈를 선보인다. 신문에서 사진을 채집해 그 사진을 다시 카메라로 찍은 작업이다. 작가는 당시 신문에서 1,600컷 정도를 채집해서 그 사진을 마이크로 렌즈로 찍고 한 달 만에 모두 인화를 했다. 막상 관훈미술관으로 갔더니 장소가 좁아 800여 장밖에 쓸 수는 없었지만, 이 전시로 인해 미술계 사람들에게 다시 인식되기 시작한다.

 

<현장 6>은 당시 현실과 발언, 서울80, ST와 같은 동인이 한 주씩 돌아가면서 합동 전시를 했을 때 냈던 작업이. 신문 사진에서 채집한 사진들을 8×10 사이즈로 확대해서 그 위 필름에 먹으로 점선을 그리고 인화한 것이다. 작가가 이 작품을 하게 된 동기는 당시 어린 간첩이 넘어왔다가 사살된 사건 때문이었다. 19~20살밖에 안 된 소년이 정치적인 편견에 의해 무참하게 총살이 된 사건을 보고 그 사람이 돌아다녔을 법한 궤적을 그려 전시한 것이다. 좌/우의 흑백논리를 벗어나 예술로써 인간 존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작업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작가는 신문 작업을 할 때 주로 동아일보를 사용했다가, 이후로 한겨레신문이 인기를 끌자 이 신문을 주로 썼다고 한다. <넌센스 미술>은 작품을 포장하는 누런 포장지 여섯 장을 이어 붙이고 구두약을 발라둔 작품이다. 그다음 옆에다가 6장짜리의 한겨레신문에도 구두약을 발라 붙여놓았다. <넌센스 미술>은 예술을 넌센스로 보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넌센스는 한 마디로 의미 없음을 뜻하는 말로, 예술을 의미 없이 보겠다는 의지이다. 작가는 의미로 예술에 접근하지 말고 형식으로 접근하자는 생각에서 이 같은 작업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형식만으로도 의미 소통이 되는데, 굳이 의미 중심으로 가려고 하는 미술에 대해 넌센스라고 붙인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신문 작업을 끝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육아와 관련한 작업도 재미있다. 4명의 작가가 있는 자녀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가 학교에 가고 나면 자신이 아이들을 돌봤다고 한다. 작은 집에서 육아하면서 현실이 착란 같았다고 회고한다. <안방>은 작가가 거주하던 안방을 촬영한 18장의 사진 작업이다. 그는 자신의 안방을 착란적 풍경으로 시각화하며 생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작품으로 담아낸다. 작정하고 망친 예술을 의도하듯, 어두운 안방에서 카메라 조리개를 개방하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200여 번의 플래시를 작동시켜 촬영한 뒤 이를 시바크롬에 인화했다. 이렇게 완성된 이미지에는 작가의 내밀한 사적 공간인 안방의 살림 도구들이 형형색색의 착란적 이미지로 중첩되어 나타난다.

 

육아와 관련한 또 다른 작업으로는 <S씨의 자손들>이 있다. 네 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스냅사진들로, 아이들이 즐겨 먹던 과자와 사탕 포장지들을 함께 벽면에 설치한 작업이다. 한 가족의 가장이 된 그의 삶이 여과 없이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핀이 안 맞거나 실수로 셔터가 눌려 찍힌, 말 그대로 망친 사진을 10여 년 동안 모아두었다. 이러한 사진들을 수집해 색깔 대비를 준 뒤 아이들이 먹던 과자 포장지를 사이사이 끼워 꽃밭처럼 표현했다. 아빠로서, 작가로서 치열했던 작가의 개인사는 세대를 초월해 공감할 수 있는 미술로 다가온다.

 

작가는 2010년대 들어 일상에서 미술의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고 발전시킨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신문 읽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작가에게 신문 읽기는 중요한 일상인데, 작가는 신문의 고정 코너인 그날그날 영어를 읽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부하는 흔적을 남겨왔다. 작가는 이 기록들에 조금씩 색깔도 들어가고 점차 예술 비슷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하는데,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얼추 3,000여 장은 될 거라고 한다. 작가가 채집한 영어 문장들은 당시 사회를 읽는 하나의 새로운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생각은 천박하게 하라. 그러나 행동은 고상하게 하라.”

– 성능경 –

 

생각은 천박하게, 행동은 고상하게 하라는 작가의 말은 상상력의 한계를 없애라는 뜻으로 읽힌다. 경계 없는 상상력을 통해 일평생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세계를 구축해 온 그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이다. 성능경은 1970년대 대표적인 미술 동인이었던 ‘ST’의 초기 멤버로서 오늘날 퍼포먼스의 모체가 된 이벤트를 시도하였고, 일상에 기반을 둔 예술을 선보였다. 서구 미술의 흐름을 인식하면서도 단순한 수용을 거부한 채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펼쳐나간 것이다. 현재 국내외 미술계에서는 성능경의 미술사적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통해 표현해 온, 그의 예술적 본능이 많은 관객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