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CRAP, 익명의 작품을 사고 파는 경험 


상점 진열대 위 익명의 작품을 사고 파는 경험


"THE-SCRAP"


 “각각의 사진은 현실에 대한 총체적 관점을 시험하고, 확정하고, 구성해 나가는 수단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사진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 그리고 우리를 향하고 있는 무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존 버거, 『사진의 이해』 中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사진은 오랜 과거에도, 가까이는 십 년 전에도 있었다. 순간을 특별하게 남기기 위해 토이카메라, 로모그래피 카메라를 비롯해 DSLR 카메라와 각종 렌즈를 구비하는 유행도 지나왔다. 각종 장비들은 사진에 담긴 순간을 감정과 분위기를 담아 좀 더 특별하고 전문가답게 일상을 포장해주는, 값비싸고 좋은 도구 역할을 했다. 


기술 발달과 함께 시대가 변하면서 훨씬 컴팩트하면서 고화질의 카메라가 탑재된 스마트폰의 전반적인 보급이 이뤄졌고, 지금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사진으로의 기록"이 상당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차지하게 된 자리만큼 사진은 이전보다 더욱 삶에 밀착해 다양한 모습과 순간들을 담아내는 매개체가 된다. 이런 밀착성이 타 예술 분야에 비해 비교적 강한 탓에 '작품'이라기 보다는 흔히 '이미지'로 소비되고, 종종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는 사실이 간과되기도 한다. 


지난 12월 27일, 사진이라는 매개체에 대한 정의와 관점, 접근 방식을 신선하면서도 세련되게 구성한 전시가 등장했다. 사진을 사고 파는 경험, <더-스크랩>이다.



더-스크랩(THE-SCRAP)내가 갖고싶은 '그것'을 보여주다. 


사고 싶은 무언가가 생겨서 다양한 소품을 파는 상점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아니, 사실 딱히 살 게 없어도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가는 곳이 상점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을 둘러싼 진열대와 매대, 카운터가 있을 테고, 잘 꾸며진 인테리어와 적당한 선곡의 배경음악으로 고객을 맞이한다. 우리는 진열대의 제품들을 하나씩 훑거나 살펴보며 내가 지불할 돈의 가치에 비등한 '그것'을 찾는다. 마침내 발견한 '그것'을 위해 지갑을 열고, 직원이 예쁘게 포장해 쇼핑백에 담아주는 '그것'을 손에 들고 상점을 나온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새로 갖게 된 덕에 한결 즐거워진다. 


[Photo : 더 스크랩 트위터]



레디메이드 포토를 판매하는 예술-상업 프로세스


<더-스크랩>은 사진을 '그것'에 대입해 제시하는 예술과 상업의 결합 시도이다. 일종의 새로운 사진 판매 플랫폼인 셈이다. 동대문구 용두동의 어느 빈 건물에서 2016년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진행된 이 전시는 신생공간 ‘지금여기’를 운영 중인 사진작가 김익현과 홍진훤이 기획했다. 


주최측이 선정한 작가 103명(팀)이 '생산'해낸 1,030장의 사진은 동일한 C-Print 인화 방식과 A4 크기로 인쇄되어 3단 철제 진열대를 가득 채웠다. 다양한 연령대와 경력으로 사진부터 미술, 미디어 아트까지 아우르는 사진작가들에게 주최측이 제시한 조건은 많지 않다. '주제 없음', '10점 출품', 'A4 크기 인쇄를 위해 일정 용량 이상으로 출품할 것'.



예를 들면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얼마든지 여러 장의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원본사진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발터 벤야민, 『기계복제시대의 예술 작품』 中

[Photo : 한겨레21, 더스크랩 제공]



누가, 어디서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다. 


각 작품 옆에는 제목, 작가와 같은 일체의 정보 없이 오직 작품 번호만 붙어있다. 전시를 찾아오는 관람객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찍고 어떤 제목을 붙인 사진인지 알지 못한 채, 건물의 세 층수를 채운 3단 철제 진열대 위 작품들을 오로지 눈에 보여지는 이미지만으로 감상하고 선택한다. 기존의 사진 전시회처럼 특정 작품이나 특정 작가에 대한 어떤 배경지식도 꺼낼 수 없다. 여기에 감상과 구매를 위한 전략적 동선의 세밀한 제시, 클럽에서 들을 법한 믹스셋 배경음악까지 더해진다. 


젊은 작업자와 관객이 만나는 매력적인 시간 


이 프로세스 안에서 1,000여 점의 작품 중 단 몇 장만을 고르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쉽지 않다. 입장권이 아닌 작품 구매권을 손에 든 관람객이 수많은 매력적인 후보군 선택에 애를 먹어 전시장 밖으로 발을 떼지 못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데스크에서 판매하는 5/10장 패키지 구매권 뒷면의 체크리스트에 마음에 드는 작품 번호를 적어 스토리지 룸(작품 저장소)에 제출하면 카운터에 놓인 대형 모니터로 각 작품을 띄워 보여준 뒤 최종 결정을 확인한다. 어느 생산 공장에서나 볼 법한 포장 가공을 연상시키는 명료한 제스처로, 손에는 흰 면장갑을 낀 채 인쇄된 작품과 함께 작가, 스테이트먼트, 캡션 등이 적힌 A4 크기의 작가노트를 스크랩 팩에 함께 담고 관람객의 대기번호를 호출한다. 마치 레디메이드 프로세스를 연상시키는 과정이다.


<더-스크랩>을 통해 우리가 남기고 싶은 건 스스로 만든 작은 경험들의 연속이다. 이를 통해 젊은 작업자로서 관객과 만나는 새로운 경로를 직접 만들어 내는 경험, 관객으로서 다양하고 색다른 시도가 담긴 사진을 보고 만지고 사는 경험, 이처럼 작업자와 관객의 서로를 향한 피드백이 하나의 플랫폼으로 모이고 쌓이는 것, 우리가 상상하는 <더-스크랩>.


<더-스크랩>전에서 직접 구매한 작품들이다. 상단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효석, 엄유정, golgye, 노은주, 뇌의 작품.



3만원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 : 전시 관람, 작품에 대한 가치 부여, 예술품 소유까지


오직 SNS와 웹사이트 홍보, 입소문으로 진행된 사흘 간의 <더-스크랩>. 이 곳을 방문한 1,546명의 '관람객'들은 5,315장의 '사진'을 '샀다'. 이 숫자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허술하지 않고 세련되게 계획된 치밀한 운용 시스템 안에서 사람들은 전시와 구매와 체험 세 가지를 모두 충족했다.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작품 판매장을 찾아온 젊은 사람들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예술품 구입’이라는 일종의 사치를 사진 5점당 3만원, 10점당 5만원 패키지로 누렸다. 


진열대 위의 사진들은 주최측의 의도대로 ‘저널리즘부터 이미지’까지 광범위한 선택지를 제시했고, 지루한 일상의 사진을 뒤로하고 ‘작품’으로서의 사진에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경험은 사람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작품을 사고 파는 행위' 아래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자신의 일관된 취향을 검토하면서, 동시에 감각의 정도를 스스로 테스트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전에 느껴보지 못한, 이 값에 작품을 '소유'한다는 만족감이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건 아닐까.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청량하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그런 느낌이었어요. 전시장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이 흐르고, 가게 매대처럼 낯익은 방식으로 진열된 사진... 그런 것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청량감이 있었어요. 

-현대미술작가 호상근


[Photo : 사진바다]



"예술에게 상업 요소를, 상업에게 예술 요소를!"


전시의 또다른 성공 포인트는 기존에 없던 형태의 전시 플랫폼의 신선함, 섬세한 매뉴얼과 리스트화, 체계화된 작품(상품) 아카이빙에 기반을 둔 출중한 기획력이었다. 구매할 작품 번호를 적는 체크리스트는 이케아에서, 구매 데스크는 유니클로에서 벤치마킹한 이 영리한 기획에서 우리는 예술에 상업적 디테일을 어떤 식으로 가미할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예술품의 실물을 제시하고, 그 작품을 직접 보고 만지고 선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새로운 소유욕과 구매욕을 자극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시를 통해 사람들은 사진이 사물과 실제의 현실을 기록할 뿐 아니라 문화∙예술적 가치를 시각적 언어로 쓴 작품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직접 구매하고 소유하는 프로세스의 체험은 예술에 대한 일반인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하나의 방도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경험의 시도는 자신만의 공간에 크고 작은 예술품들을 두고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또한 사람들이 사진을 접하고 소비하는 이전의 방식으로는 적절한 셀링 포인트를 찾지 못하던 작가들에게 있어, 새로운 유통 구조를 향한 <더-스크랩>의 모색과 성공은 작가들의 수익 구조에 대한 문제점을 다시 한 번 경각시키는 동시에 판매 플랫폼의 다양한 전개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이번 전시 경험자들의 대다수는 해프닝과도 같은 <더-스크랩>의 후속작을 원하고 있다. 예술과 상업의 접점을 찾는 key가 멀리 있지 않다.



관련 사이트

더-스크랩 공식사이트 : the-scrap.com/

더-스크랩 공식사이트 twitter.com/the_scrap_


☞ 참고기사


더스크랩 기획자 홍진원 인터뷰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