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감성에 응답하다, 인문학적 CSR 



많은 이들의 지성과 감성의 부름에 답하는 일, 인문학적 CSR


어느 순간부터 인문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사회적인 흐름 속에서 찾아보면, 경제학적 트렌드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마르크스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명제가 증명해 주듯이, 풍요로운 시대에는 먹고사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예술과 철학, 문학이 발달하지만, 경기가 어려운 시절에는 효율을 중시하면서 이러한 학문의 수요와 공급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역시 IMF를 거치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기업 경영에 필요한 소수 인재만 선발하게 되면서, 상아탑의 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고도 토론과 집회를 통해 정치, 역사, 철학에 대해 높은 지성을 쌓았던 대학생들이 전공과 관계없이 취업 되었던 80년대와 달리, 90년대 이후 대학 분위기는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취업에 유리한 전공을 선호하게 되면서 인문학 관련학과의 위상이 크게 낮아졌다.



학창시절 스펙에 밀려 미처 이야기 나누지 못했던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 열풍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현상은 최근 20년간의 인문학 소외현상의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주류인 청장년층이 학창시절 인문학적 교양을 쌓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의 수요가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대중적인 수요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학계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인문학 지식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은 물론 기업들의 후원 역시 절실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적 CSR이 대두된 현상은 이러한 배경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인문학 CSR은 아직 하나의 CSR 카테고리로 정의되지 않은 분야이다. CSR의 범위는 자연, 환경, 보건, 예술, 복지 등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최근의 인문학 열풍을 타고 우리나라 기업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인문학을 CSR에 적용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인문학 연구에 연료를 제공하는 일, 재단 설립을 통한 후원


가장 전통적인 후원은 재단을 통한 순수학문 후원일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CSR 활동이 많은 이유는


첫째, 많은 경우, 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이 CSR의 주 대상인 반면, 인문학에 대한 투자는 불특정 다수의 공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기업 내 CSR 활동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경향이 있고,

둘째, 환경 보전이나 수해 복구 등 직접적인 이슈 해결이 아니기 때문에 홍보 관점에서 Impact가 약하여 기업 내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우며,

셋째, ‘학문’이라는 특성상 CSR 전담 부서에서 맡아서 진행하기에 전문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단을 설립하고 후원할 수 있다면, 재단을 통해 전문 인력을 고용할 수 있고, 재단을 내세워 홍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기업의 이익과는 별개로 설립자의 뜻을 받든 목적성이 분명한 CSR 활동이 가능하다.

 



기초 인문학 육성에 대한 오래된 열정. 대우재단



대우재단은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1978년 사재 50억 원을 출연하여 설립한 재단으로 인문학을 비롯한 기초학문 육성은 물론 문화예술과 인재발굴 등에 힘쓰고 있다. 특히, 학계에 대한 연구 지원을 물론, 전문학술총서를 발간하여 40년 동안 다양한 학술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대우재단은 매년 세계적인 석학을 초청하여 2000년부터 ‘석학연속강좌’를 개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동안 신학과 철학, 인류학, 자연과학, 심리학, 국제학 등 다양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러한 활동들은 대중들이 소화하기에는 다소 수준이 높고, 적극적인 대중 홍보가 미흡하여 사실상 상아탑 속에서의 연구 지원에 그쳤던 감이 있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대우재단은 한국 고전과 서양 고전, 학술 교양, 시사 교양 등 일반 대중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분야에 그간 쌓아온 학술 콘텐츠를 결합하여 동영상 강좌를 제작해 자치 단체와 공공 도서관에 배포한다고 밝혔다. 인문학에 대한 투자 범위를 학계에서 대중으로 넓히며 공공 CSR 영역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것이다.



인문학을 통해 시대정신을 생각하다. 두양문화재단



대기업의 CSR 활동은 아니지만, 재야의 기업가 오정택 님이 사재 100억 원을 들여 설립한 두양문화재단의 케이스는 조금 특별하다. 설립자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감수성과 사회 구성원들 간의 유대, 그리고 시대정신이 사라졌음을 통감하고 국내 유수의 종교학, 철학, 자연과학 교수들을 초빙하여 2014년, ‘건명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다. 


‘건명원’은 매년 서른 명가량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국내외 저명한 종교학, 역사, 철학, 뇌과학, 인류학 교수들의 지도하에 1년간 무료로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선발된 이들은 엄격한 학사관리 하에 고전을 강독하고 사회, 철학, 삶, 정치 등 다양한 현실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 상호 간 이질적인 학문을 융합하여 새롭게 사유하는 방법을 훈련한다.

 

[Photo : 건명원 수업장면: KBS ‘생각의 집’ 프로그램 홈페이지]


호기심과 상상력이 실종되고, 효율성을 추구하며 달려온 현대 사회의 모습에 두양문화재단이 설립한 ‘건명원’의 행보는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문학을 젊은 세대에 전수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취지는 축적된 지식과 자본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CSR의 기본 정신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쉽고 재밌게, 기업들의 인문학 콘텐츠


반면, 아카데믹한 내용을 넘어 보다 대중적인 방법으로 다수의 사람에게 인문학을 보급하는 CSR 활동도 다수 존재한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좌절을 느낀 청년 세대들을 위해 이러한 CSR 활동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삼성그룹과 교보생명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젊은이들의 꿈, 열정, 도전과 함께하다. 삼성그룹


삼성 청춘문답: www.samsung.co.kr/answer/about


2010년대 학번을 가진 지금의 20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을 들어봤을 ‘열정樂서’. 인문학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2011년, 삼성그룹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대학생 대상의 순회 강좌를 시작했다.


강의는 고전, 철학, 역사 따위의 지식을 담기보다는 이 시대 젊은이보다 수년에서 수십 년 먼저 살아온 멘토들의 고민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에 가까웠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인간 본질에 대해 성찰하고 더 나은 삶과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주제와 무관하지 않듯,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부닥친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치유해 주는 자리로서 ‘열정樂서’는 큰 의미가 있었다.


성공한 직장인의 표본인 삼성의 임원들은 물론, 셰프, 운동선수, 아나운서, 대학교수 등 다양한 직종의 멘토들이 ‘열정樂서’와 함께했고, 구직난과 사회적 경쟁 시스템에 지친 젊은이들은 ‘취업, 돈, 성공’이라는 세속적 가치에서 잠시 벗어나 멘토들이 앞서 고민하고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만의 ‘꿈, 열정, 도전’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었다. 전국 20개 도시, 80의 강연, 30만 명의 누적 참가자를 기록한 ‘열정樂서’는 2014년 끝을 맺었지만, 삼성그룹은 2015년 ‘Play the Challenge 토크콘서트’, 2016년 ‘청춘문답’으로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Photo : 열정樂서 한 장면: 삼성전자 블로그 Samsung Tomorrow]


삼성의 이러한 활동은 세계 일류 기업이 영리 추구가 아닌 사회 환원의 일환으로 젊은이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주었다는 것에 의의가 크다. 이러한 대기업 CSR 활동의 성공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하는데,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중 강연들이 미디어를 타고 더 큰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O tvN의 ‘어쩌다 어른’이나 SBS CNBC의 ‘인문학 특강’ 시리즈는 대중 강연의 포맷을 차용하고 있다. 시청률에 따라 존폐여부가 갈린 상업방송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는 것은 사회적인 인문학 수요의 증가에 부응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에 앞서 ‘열정樂서’와 같은 대규모 강연 성공 사례들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교보생명


교보생명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https://www.kyobostory.co.kr/main.do


삼성그룹의 사례가 직접 소통하며 체온을 느낄 수 있는 CSR 사례라면, 교보생명의 사례는 간접적이지만 온라인을 통해 일반인들의 인문학적 교양을 넓혀주는 CSR 활동이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는 광화문 교보빌딩에 시즌마다 걸었던 시구와 글귀들을 모아 2010년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걸린 감성적인 글귀들은 많은 사람에게 잔잔한 감동을 남겼고, 바쁘게 살아가는 출퇴근길 직장인들에게 작은 여유를 선사했다. 교보생명은 이 책의 제목을 따와 같은 이름의 인문학 콘텐츠 사이트를 오픈하여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철학, 고전, 역사, 미술과 같은 전통적인 인문학 컨텐츠는 물론이고,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반려동물, 음식, 심리학, 인테리어, 건강에 걸쳐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다만, 웹진의 형태에 가까워 폐쇄적인 구조인 관계로 신규 콘텐츠 양산이 더디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앞 현판’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인 이미지 자산을 인문학적 콘텐츠 CSR 활동으로 연결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고, 온라인을 통해 지식과 다수의 대중이 만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시사점이 있다고 하겠다.




인문학 CSR의 전망


지금까지 크게 재단을 통한 인문학 후원과 대중과 소통하는 CSR 활동을 살펴보았다.

재단 설립은 사업적 성공으로 큰 부를 쌓은 기업가들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사회공헌 방식이다. 노벨상을 만든 노벨이나 카네기 재단을 설립한 철강왕 카네기도 그랬듯, 인류와 사회에 대한 헌신은 막대한 이윤을 축적하는 것보다 더 높은 이상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3000억 원의 사재를 들여 과학재단을 설립한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회장이 그랬듯 인문학을 비롯한 순수학문에의 지원은 21세기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 될 수 있다. 


또한, 소비자의 니즈가 점점 다양해지면서 산업과 인문학적 감수성을 결합해야 하는 시대에 이러한 인문학적 연구 성과는 기업 활동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고객을 소비하는 객체에서 사용하고 평가하는 주체로서 바라보는 시각이 확산되는 지금의 트렌드에 비추어 볼 때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에 대한 투자는 결코 상아탑의 결실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중에 대한 인문학 보급 역시 많은 기업에서 더 선호할 CSR 활동으로 기대된다. 다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여기저기 조금씩 분포되어 있는 접근 가능한 인문학 콘텐츠들의 통합이 요구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모아줄 수 있는 개방형 디지털 플랫폼을 개발하는 공익적 사업도 생겨날 것이고, 기업들은 이런 플랫폼 자체를 후원하거나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CSR 채널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감수성이 메마른 저성장 시대에 인문학이 그저 잠깐의 사회적 치유 트렌드일지 아니면 메가 트렌드로서 꾸준히 주목받을지 아직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CSR 분야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무한한 콘텐츠와 휴머니즘을 담은 이 학문이 현대 기술과 자본을 만나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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