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새로운 문화예술 생태계를 만들다 


청년 창작자와 장인 세대가 이루는 시대적 협업의 장소


<을지로>


이 시대 문화와 산업의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콜라보레이션, 즉 협업이다. 단일적인 자력으로는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버거운 과열경쟁 시대에, 너와 나 둘의 특색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협업은 단순한 트렌드로 치부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패션 업계에서 주로 쓰이던 콜라보레이션은 이제 ‘공동의 협력’이란 본래 의미에 충실히 예술, 문화, 디자인, 기술, 학문 등 다양한 산업에서 발견된다. 


콜라보레이션은 분야의 확장을 넘어 곧 경계를 붕괴하려는 듯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의 오래되고 낡은 동네 을지로에서 기존 지역의 문화적 토대를 양분 삼은 두 세대 간의 콜라보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숙련된 기술로 을지로를 지켜오던 기존 장인 세대와 새로운 문화와 공간을 갈구하는 청년 창작자 세대가 만나 문화적 반응과 시대적 협업이 일어나고 있는 곳. 바로 지금의 을지로다. 


을지로는 근 현대적 면모와 누적된 기술적 가치의 집대성

을지로 지하 보도와 세운상가가 이루는 십자 축을 중심으로 일대를 아우르는 지역의 변화가 요즘의 화두다. 특히 큰 변화를 나타내는 청계천과 을지로 사이의 을지로 3가 구역은 1950년대에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형성되어 근대적 도시 평면과 근현대 건축자산을 갖춘 역사 도심이다.  

 

[Photo : 중구청]


을지로는 거의 모든 소재의 가공을 다루는 덕에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삼는 제2의 고향이다. 왕년의 도심 산업 메카답게 대로변과 골목 곳곳을 빼곡히 채운 공구 거리, 조각 거리, 미싱 거리, 타일/도기 거리, 조명 거리가 건재함을 과시한다. 인쇄 골목은 숙련된 장인 기술과 첨단 설비로 전문적인 체계를 갖춰 예비 작가와 디자이너들의 전통적인 포트폴리오 탄생지였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을지로는 예술과 밀접히 연관될 준비를 마친 건지도 모른다. 


을지로의 변화에 대응하는 정부의 두 가지 방안, 도시환경 개선과 창작자 지원 

신규 세대와 문화가 낡은 을지로에 바삐 유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불협화음은 불가피한 성장통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정부의 첫 번째 숙제는 가장 큰 취약점인 열악한 도시 환경이었다. 수표동 일대의 을지로 3가 구역을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지정해 근현대 건축물의 원형과 구조를 보존하는 선에서 재개발에 착수했다. 도시 조직을 고려한 소규모 분할 개발 방식으로 공원과 주거, 업무, 숙박 시설을 조성하고 옛 물길도 복원하게 된다. 그 외 충무로 3, 4, 5가와 을지로 4가, 오장동 일대를 중구 인쇄 특구로 지정해 인쇄 산업과 전문 디자인업 등 권장 업종을 선별하고 기반 시설 지원을 계획 중이다. 


두 번째 숙제인 젊은 세대의 수월한 을지로 진입을 위해, 원래 임대료의 10%와 운영비 부담을 조건으로 청년 창작자들에게 빈 점포를 빌려주는 중구청의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는 창작 활동에 숨통을 열어주는 주요 대응책이었다. 또한, 문화유산해설사가 현장을 함께 걸으며 을지로 역사와 노포, 신생 공간을 소개해주는 을지로 골목 투어 프로그램 <을지유람>은 기존 을지로 세대와 신규 유입 세대의 조화로운 융합에 일조했다. 


청년 창작자들의 고향이자 원동력인 을지로


“일반인에게 을지로는 낙후된 도심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미술 전공생들에겐 고향 같은 곳이다. 

작품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거나 작업 발주를 위해 수시로 드나들던 곳이다.”

고대웅 작가


저렴한 임대료와 숙련된 기존 세대의 기술은 청년들이 을지로를 찾아오는 대표적인 이유로 익히 알려졌지만, 을지로의 매력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장인들에게 도움을 얻고 자문을 구하며 각종 분야 종사자를 서로 소개하는 과정에서 청년 창작자와 장인 사이의 인프라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또한 을지로 특유의 역사와 소재거리들은 창작자로 하여금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야말로 예술 활동의 원천지에 둥지를 튼 신생 문화예술공간과 그룹들이 을지로의 새로운 콜라보레이션, 문화예술적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1. 을지로하와이 

2. 을지로움

3. 커피한약방

4. 노말에이

5. 퍼블릭쇼

6. 신도시



1. 을지로하와이

을지로의 하와이가 되고 싶었던 시각예술 작가 셋(김채린, 김용현, 구수현)이 모여 만든 문화예술 기획팀 ‘을지로 하와이’의 결성 배경은 매력적인 을지로의 정서와 인간미였다. 운동 경기를 응용한 작품을 을지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 전시를 열고, 지역 상인과 장인들이 경기 선수로 참여하는 <청계추계체육대회> 프로젝트는 을지로라는 지역과 예술가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다.   

 

[Photo : 세운상가 & 구수]


을지로에 상주하는 작가들과 연계해 그들의 상상력을 담은 <을지로(에서 하고 싶은)것들>은 이들이 을지로에 대해 갖는 애정의 연장선상이다. 을지로움이 꿈꾸는 다음 작업은 을지로 상인들과 작가들이 함께 기술과 능력을 뽐내는 기능대회 형식의 프로젝트다. 이보다 을지로다운 콜라보레이션이 있을까. 



2. 을지로움

폐유리 업사이클링 디자인그룹 영점영(0.0)의 작업실인 을지로움은 <을지로 디자인/예술 프로젝트>에 3호로 선정된 스튜디오다. 을지로움을 운영하는 이지성 작가는 세운상가의 그래픽 사인 홀을 바꾸거나 중구청의 예술 프로젝트에 방향성을  제안하고, 을지로의 예술가들이 함께한 <을지로 라이트웨이>에 참여하기도 했다. 

 


을지로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도 그들이 해야 할 일 중 하나. 도시 속의 예술가로서 을지로 지역민들과 함께 문화적 영감을 주고받는 것이 그가 꿈꾸는 작업이다. 




3. 커피한약방

30년 경력의 강윤석 뮤지컬 배우가 을지로 특유의 레트로함을 재해석한 커피한약방은 지역 명소가 된 지 오래다. 6-70년대에 대한 애정으로 을지로의 멋스러움을 유지하고 싶어 고건물의 내외를 최대한 보존한 공간에는 골동품이 가득하다. 

  

물씬 풍기는 옛 정취 때문인지 주변 오래된 점포들과도 색다른 어울림을 보인다. 을지로의 노가리 골목과 골뱅이 골목, 호프 골목과 함께 코스로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덕분에 커피한약방을 찾는 연령대는 청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하다. 타 지역 사람들마저 을지로로 끌어모으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명실상부 을지로의 사랑방이다. 




4. 노말에이(Normal A)

노말에이는 을지로의 유일한 서점이다. 김진영, 서지애, 제임스 정 디자이너로 이루어진 그래픽 디자인 그룹 일삼일와트(131WATT)가 국내외 독립 출판물, 디자인 서적, 그래픽 노블, 매거진, 문구류를 비롯해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출판물로 노말에이를 채운다. 

    

서점이라고 해서 책만 팔지는 않는다. 비정기적 영화 상영회와 창작 워크숍,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해 콘텐츠를 소홀하지 않는 모습이다. 여기에 을지로의 인쇄골목을 오가는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자연스레 노말에이의 문을 열고 들어와 대화를 나누고 인프라를 형성하면서 지역의 특수한 문화예술적 접점의 포지션을 갖게 됐다. 



5. 퍼블릭쇼

‘을지 1호’라는 별칭을 가진 퍼블릭쇼는 산림동의 작은 예술 공간에서 도자 공예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실험하고 전시하는 브랜드다. 공예 외에도 작가 브랜드, 상품기획/디자인 컨설팅, 공공미술/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며 세라믹 오픈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퍼블릭쇼는 을지로의 수혜자라 할 수 있다. 중구의 임대료 지원을 통해 경기도 이천에 있던 작업실을 을지로로 옮긴 뒤, 이전에 생산할 수 없었던 다양한 도자 디자인을 실험할 수 있게 됐다. 도자 공예에 필수적인 용접, 시보리 업체가 을지로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구청의 지원에 대한 퍼블릭쇼의 보답은 구청의 축제, 도시 외관 정비 사업 등에 대한 협조다. 작품 전시와 디자인 및 설치를 돕고 이에 필요한 부자재나 가공은 을지로에서 해결한다. 


[Photo :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



6. 신도시

새까만 건물 입구로 들어가 5층까지 이어지는 좁은 계단을 오르면 붉고 푸른 원색의 빛이 매섭게 쏘아대는 곳. 술집, 공연장, 전시장, 작업실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 신도시는 미술작가 이병재와 사진작가 이윤호의 합심으로 태어났다. 

  

다국적 음악, 메뉴판에 빼곡한 술, 붉은 조명의 5층이 사람들이 보는 일반적인 신도시라면, 바로 아래 4층에서는 출판사와 레이블의 모습을 가진 또 다른 신도시가 있다. 작가, 그래픽 디자이너, 뮤지션들과 쉐어하는 4층 작업실 공간은 신도시가 다양한 문화의 아티스트와 교류하고 ‘을지로스러운’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을지로의 폐업 식당 간판을 내걸며 시작된 신도시는 이제 예술 작가와 직장인, 이방인까지 한데 끌어모으는 을지로의 ‘요소’가 됐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자생적 공생 관계가

젊은이와 노인이 공존하는 지금의 을지로를 만들다


청년과 장인들이 함께 움직이는 변화가 을지로를 바꿨다

을지로를 배경으로 한 청년 창작가들과 장인 세대의 콜라보레이션은 크고 작은 생산적 결과를 낳았다. 어떤 작가는 을지로의 지도와 버스정류장의 의자를 제작하고, 어떤 그룹은 산림동 예술길 프로젝트와 스스로의 을지로 문화정비사업을 진행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을지로 거리와 상생할 수 있는 유무형의 작품을 만들어 내놓는다. 


청년들의 예술 활동은 지역과 사람을 바꾸고, 이런 변화는 이방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자연히 을지로인들과 이방인을 위한 카페와 술집이 생겨나고, 이것이 더 많은 사람들과 생기를 만들어낸다. 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는 장인 세대가 을지로에 쏟은 삶이 존재한다. 어쩌면 청년 세대와 장인 세대를 넘어 사람과 을지로의 콜라보레이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자생적 공생 관계를 통해 발견하는 이상적인 도시 재생의 가능성

을지로에서의 콜라보레이션은 두 세대 간의 자생적 활동이란 점이 중요하다. 장인 세대는 지역 생태계의 유지 및 발전에 필요한 활력과 원동력이 필요했고, 청년 창작자 세대는 자신의 업을 위한 공간과 기술, 문화가 필요했다. 이들은 필요와 의지에 의해 건강한 공생 관계를 자발적으로 형성했다. 서로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지역을 발전시키는 이상적인 도시 재생의 가능성을 관찰하는 순간이다. 겉핥기식의 도시 재생 사업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는 을지로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콜라보레이션의 원동력과 분명한 희망을 발견한다.



☞ 참고 사이트


을지유람 신청 사이트


‘경계에서 공존을 외치다’, 을지로하와이 인터뷰 


을지로 입주 작가들의 스토리 펀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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