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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공미술이 뭐예요 ②] 새 장르 공공미술

그래서 공공미술이 뭐예요 ② : 새 장르 공공미술


“공간에 민망한 조형물을 넣느니, 차라리 나무 한 그루 심는 게 시민들에게는 더 유익하다.”

작년 가을, 안규철 서울 공공미술자문단장이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면, 맥락 없이 비대한 몸뚱이를 자랑하는 조형물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공공미술은 누구를 관객으로 상정하고 또 어떤 경험을 제공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고민이 함께 담긴 듯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지난해 서울역 근처에는 <슈즈 트리> 외에도 <윤슬: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이라는 조금 다른 유형의 공공미술 작품이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리동 광장에 위치한 이 작품은 건축사무소 SoA의 공공미술 작업이자 서울시 공공미술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 1호 작품이기도 합니다. 겉에서 보면 폭 25m의 대형 광학렌즈의 모양인데 지면에서 4m 아래로 움푹 들어가 있어서 관객이 그 밑으로 내려가 공간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작품 천장에 달린 수퍼미러 재질의 구조물 때문에 공간 내부에는 반사된 빛이 일렁이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관객의 체험 자체가 작품을 완성합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이 작품은 영구설치가 아니며, 이곳을 배경으로 시민 참여형 퍼포먼스 <윤슬 사용법> 등이 기획되었다는 점이 있겠네요.


서울 속 사람과 삶의 모습을 담아낸 '윤슬'


이처럼 장소로서의 형태를 지니거나 일시적, 참여적 형태를 띠는 공공미술은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경향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작업은 어떻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무엇을 목표로 이루어질까요? 또 어떻게 시민이 참여하는 워크숍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경험이 공공 미술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요? 본 글에서는 이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돕고자 우선 서양 미술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개인의 목소리를 귀담기 시작한 공공미술


국가 주도하에 제작 지원을 받던 기념비, 인물상, 벽화 따위를 뒤로하고, 1960년대 중후반 유럽과 미국에서는 도시 재생과 연계한 공공미술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산업구조의 변화로 제조업이 발달했던 도시들은 이미 공동화 현상을 겪고 있었고, 이 도시들이 다시 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방법으로 ‘문화 도시’로서의 탈바꿈이 국가 차원에서 유행처럼 번졌기 때문입니다. 문화 자원이 풍부한 지역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미술관에 있던 조형물을 거대하게 부풀려 야외에 가져다 놓는 식의 프로젝트가 기획되었고, 주변 환경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작품들이 거리에 대거 등장했습니다.



당시 공공 조형물을 두고 ‘플랍 아트(Plop art)’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생각없이 머릿속에 떠오른(plop) 것을 만들었다는 조롱조의 표현이다.

| Tony Rosenthal, <5-in-1(1971)> 


[Photo : Tony Rosenthal]


한편 1970년대 중반 전후로 공공미술의 개념과 형식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복잡다단한 요인이 작용했는데, 예를 들면 시민 권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던 사회 분위기가 있습니다. 여성, 유색 인종, 노인, 노동자, 젊은 세대 등 다양한 정체성을 대변하는 집단들이 정체성과 문화를 드러내면서 저마다의 요구를 표현할 수 있는 공론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죠. 또 미술계 내부에서도 제도화된 예술, 국가 혹은 기업 이미지 마케팅을 위해 도구화된 예술을 벗어나기 위한 여러 시도가 나타났습니다.


남성 권력이 지배하는 미술관 시스템이 존재하기 위해 배후에 필요한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의 존재를 가시화하고자, 작가는 직접 미술관을 수 시간 동안 청소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Mierle Ukeles <Washing/Tracks/Maintenance(1973)>  


[Photo : Ronald Feldman Fine Arts]

 

작가는 자신의 대지 미술 작품이 갤러리에 전시되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했다.

| Robert Smithson, <Spiral Jetty(1970)>


[Photo : Gianfranco Gorgoni]


남성화된 고립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야 했던 여성 작가들의 여성주의 미술, 사막이나 해변 같은 너른 자연 공간에서 나타나는 대지미술 등 당대 시스템이 포괄하지 못했던 여러 주장이 미술관 바깥으로 실험적인 형식을 입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달리 말하면, 점차 공공미술의 주체가 국가나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공공미술은 공공성에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1980년대 초, 시민의 마음을 흔든 공공미술 프로젝트 두 가지


이러한 배경 속에 1970년대 후반부터 공중의 의견과 취향을 반영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쟁점이나 특정 지역의 역사나 사회 갈등을 소재로 다루는 공공미술 작업이 활발하게 나타났습니다. 제작 방식도 미술가와 관객의 공동 작업, 일시적 퍼포먼스나 장/단기 프로젝트 등으로 다양해졌죠. 더이상 관객은 작품을 관람하기만 하는 수동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외려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이를 직간접적으로 구성하는 협업자로서 더욱 능동적인 지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Richard Serra, <Tiled Arc(1981)>



미국 작가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1981)>는 공공미술 역사에 있어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1981년 뉴욕 연방 건물 앞 광장을 가로질러 설치되었던 이 작품은 격렬한 논쟁 끝에 시민들의 시야와 보행에 대한 권리를 침해한다는 법원의 판결로 끝내 1898년에 철거되었습니다. 철거 전 작품의 위치 이동을 고려했던 한 재판에서 작가는 그의 작품을 변호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울어진 호’는 오직 하나의 특별한 장소인 연방 광장(Federal Plaza)을 위해 설계되었다. 이것이 장소특정(Site-specific)적인 작업인 만큼, 재배치는 있을 수 없다. 작품을 옮기는 것은, 작품을 파괴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그 광장을 지나다니는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몹쓸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대중들에게는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이 강요되었을 뿐 사실상 제대로 된 정보나 교육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의 작업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공공미술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상태였죠. 하지만 흥미롭게도 작가의 장소특정성에 대한 언급과 함께 몇몇 재판에서는 시민들이 직접 자신을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예술적 개입의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면서, 이후 이 작업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논쟁은 결국 학자와 비평가 사이에서 공공미술의 개념과 기능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습니다. 공공미술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그 개념과 범주에 대한 학구적 연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편, 글머리에 언급한 서울 공공미술단장은 아마 인터뷰 중에 독일 작가 요젭 보이스(Joseph Beuys)의 작품 <7000그루의 떡갈나무(1982-1987)>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대 주요 작가 중 한 명인 요셉 보이스는 미술이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에 깊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자기 자신과 그의 프로젝트 참여자들로부터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기대했던 작가입니다. 그는 독일 학생당 등 제도 대항적인 조직들을 만들고 “여기서 행해지는 것은 미술이다.”라고 말했죠. 모두에게 열려 있는 토론의 장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의견교환 활동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예술 작품이자 ‘사회적 조각’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라고 표방했습니다.


Joseph Beuys, <7000 Oaks(1982–1987)>



그의 작업 <7000그루 나무>는 그가 제7회 카셀 도쿠멘타 전시 개막에 맞춰 전시 본관 앞 광장에 떡갈나무 한 그루와 근교 채석장에서 가져온 현무암을 함께 심은 뒤, 다음 전시가 이루어지는 5년 뒤까지 나무와 돌기둥 7000쌍을 카셀 시 전역에 심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되었습니다. 5500여 쌍을 심은 뒤 의문의 심장마비로 작가는 도중에 사망했지만, 뜻을 이어받은 그의 가족들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추진했습니다. 나무와 돌기둥을 어디에 심을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과 실제 식수 과정에서 거주민, 학교, 지역의회, 지역조합 등 카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도시화로 인한 도심 내 녹지 축소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생태적인 ‘기념비’를 세웠던 이 프로젝트는, 한편 시민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공공 공간을 차지하고 이용하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공공미술의 새로운 이름, ‘새장르 공공미술’



작가는 2년여 간 워크샵을 통해 여성 노인 그룹과 기억, 일상, 노화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퍼포먼스 작업을 벌였다.

| Suzanne Lacy, <The Crystal Quilt(1985)>



사회 내 비주류, 소외 집단의 개인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정치적 쟁점에 대한 논의를 일으키는 당시 작업은 앞선 시대의 공공미술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더이상 영구적이거나 고정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사람 간의 교류 자체를 작품의 내용 및 형식으로 삼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공공미술은 이제 개방된 장소가 아닌 공중(公衆)으로부터 공공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와 의도를 지닌 다양한 공공미술 작품을 아울러, 작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새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라고 칭했습니다. 그의 저서 <새장르 공공미술: 지형 그리기(1995)>에서 처음 사용된 이 용어는 이제 공공미술을 “폭넓고 다양한 관객과 함께, 그들의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쟁점에 관하여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하여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시각예술”이자 “사회적 개입”으로 정의합니다.


“모든 미술은 미술가와 작품의 수용자 사이에 하나의 공간을 가정한다. 전통적으로 그 공간은 미술 오브제로 채워졌었다. 그런데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서 그 공간은 미술가의 작업 전략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관객과 미술가의 관계에 의해 채워진다.” 


국가에서 개인으로, '새 장르 공공미술' 글을 마치며


이렇듯 공공미술은 한쪽으로는 국가, 기업 등에 지원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기존 질서를 재고하고 저항하면서 독특한 정의와 범주를 개척해 왔습니다. 한때 오로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도구였던 공공미술은 이제 역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끔 환경과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 관심을 둡니다. 개인의 경험에 녹아있는 사회 이슈를 어떻게 공론화시킬 것인가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공공미술의 중요한 화두이며, 대중은 여전히 그 관객이자 동시에 협업자입니다.


한편, 서구 공공미술의 역사가 시민의식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는 정치,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국내 여러 이슈를 바라보는 인식이 금새 조금 더 성숙해짐을 느낄 때마다, 종종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전에는 도대체 얼마나 국가주의, 성장주의, 유교적 사고에 익숙해 있었던 걸까 반추해보기도 합니다. 연장 선상에서, 우리에게 공공미술이라는 말이 자주 막연하게 들리는 까닭에는 어쩌면 한국 사회를 살아온 우리에게 ‘공공성’이라는 주제 자체가 그동안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낯선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개인의 일상, 생각과 감정이 이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같이 인지하고, 누구나 두려움 없이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면서 다음 글에서는 그러한 공론장을 만드는 데 앞장 서는 한국 작가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 연재기사


[그래서 공공미술이 뭐예요? ①] 기념비와 대형 조형물을 살펴보다


[그래서 공공미술이 뭐예요 ③] 새로운 공론장을 여는 한국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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