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분위기, 전주국제영화제의 기억 


그 날의 분위기, 전주국제영화제의 기억






국내 3대 영화제로 손꼽히는 전주국제영화제가 20주년을 맞이했다. 봄비 덕분에 운치 있었던 작년 영화제와 달리 이번 영화제는 초여름의 낭만이 가득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될지 모를 영화를 보고 나선 명동 거리에는 훈훈한 밤공기와 남색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영화제가 있었던 매일 밤 길모퉁이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산 후 20분이고, 30분이고 걸었다. 스크린 속 세상으로부터 배운 이야기들을 곱씹으며 이 생각, 저 생각 자유롭게 하다 숙소에 도착하면, 평소에는 일상의 피로에 찌들어 좀처럼 쓰지 못했던 일기가 술술 써졌다.


“영화, 표현의 해방구”라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제를 빛내는 수많은 관객, 감독, 배우, 자원봉사자들에게 사색할 여유를 선물했다. 감수성이 메말라 자기 자신도, 타인도 사랑할 수 없었던 <오즈의 마법사> 속 양철 나무꾼이 심장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 듯, 관객은 다시 보기 어려울 위한 영화들과 지역 축제의 열정 덕분에 새사람이 되어 일상 속 제자리로 복귀한다. 나, 그리고 우리는 짧다면 짧은 축제 기간 알 듯 말 듯 한 감상에 빠져 무기력증을 극복한다. 지난 선택을 복기하고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놓고 즐겁게 고민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영화제에 대한 모든 사람의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각자 관람할 수 있는 영화, 갈 수 있는 음식점, 그리고 묵는 숙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관객일지라도 엄청난 양의 프로그램과 행사를 다 소화하지는 못한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더라도 예매 전쟁에서 실패하면 그 영화는 나의 영화가 될 수 없다. 또한 가고 싶었던 음식점이 있더라도 영화 시간과 맞지 않는다면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영화를 취소하거나, 아니면 다른 음식점을 들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숙소. 미적미적 숙소를 예약하는 이들에게 남은 옵션은 영화광 시네필 옆에 시네필이 잠드는 8인실 또는 10인실일 것이다. 그들과 함께 숙소에 묵는다면 아침 기상 시간은 필히 1~2시간 앞당겨질 것이고 영화제에 대한 기억이 쌓이는 시간도 더 길어질 것이다. 특히 올해의 경우 스타워즈 경품을 쫓아 영화제에 온 사람들이 많았다. 필자와 숙소에 함께 머무르던 이 중 제일 일찍 일어난 친구는 오전 5시쯤 이미 명동으로 향하기도 했다.


전주 시내 한 커피숍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영화 관람만큼 소중했던 나에게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3가지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목록>

A. 국제경쟁 대상 수상작 - < 내일부터 나는(From Tomorrow on, I Will) > 

B. 익스팬디드 시네마 - < 거대한 기묘함(The Grand Bizarre) >

C. 선미촌의 작은 서점 ‘물결서사’





A. 국제경쟁 대상 수상작 - < 내일부터 나는(From Tomorrow on, I Will) >



[사진출처: 베를린국제영화제]



“어떤 사람은 커다란 꿈을 품고 살아가, 그 꿈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꿈 없이 살다가, 역시 그 꿈을 잃어버린다.” 

-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António Nogueira Pessoa)



매해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예매에 실패했던 터라 올해는 예매의 베테랑이 되고 싶었다. 그 간절함이 수업 시간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면서 예매를 감행하게 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한 것에 비해 결과는 처참했다. 미리 카탈로그를 열심히 숙지했건만, 내가 원했던 영화 중 딱 한 편만 예매에 성공했다. 그 영화의 제목은 <내일부터 나는> 이다.


<내일부터 나는>은 세르비아 감독 이반 마르코비치(Ivan Markovic)와 중국 감독 우 린펑(Wu Linfeng)이 공동연출한 장편 영화다. 베이징의 건물 지하에 거주하는 극빈층을 일컫는 ‘생쥐족’ 청년 리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구현했다. 그가 유일한 친구인 룸메이트에게 하는 말, 혼자 있을 때 부르는 노래, 공허하고 깊은 눈빛 등을 통해 복잡미묘한 그의 생각 중 일부를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리의 감정을 억지로 가르치려 들지도, 따라오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또 명확한 기승전결을 통해 리의 삶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리’라는 사람, 노동자, 친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리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나에게 리는 벗어나고 싶은 현실 속 아주 작은 숨구멍을 찾아 숨을 쉬는 사람이었다.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명확하게 열망하는 바가 있었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었고, 또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낼지 고민하고 때론 묵묵히 감정표현을 시도하며 살아갔다. 어쩌면 평생 넘지 못할 빈부격차의 벽 앞에서 절망하면서도, 빛바랜 오뚝이처럼 절절하게 다시 일어나는 그는 분명 살아있는 존재다. 더러운 지하실에서의 삶을 영위해가는 그는 진짜였고, 어떤 면에선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리의 아파트, 초라한 직업, 룸메이트와의 무심한 관계 속 드러난 외로움 등을 통해 그를 불쌍한 사람으로 단정 짓고 동정할 수 있다. <내일부터 나는>을 통해 중국의 암담한 현실에 대해 배웠다고 이야기하며, 리를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리 또한 우리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눈앞에 달콤한 사탕과 편리를 좇아 생각하고 느끼기를 포기하는 삶은 새로운 삶의 방식일 뿐 잘 사는 삶이 아닐 수도 있다. 관찰하지도, 누군가의 곁을 은밀히 지키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우리가 이 영화의 주인공보다 얼마나 더 열망과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경제적 차이가 나와 너를 가르는 절대적 지표가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나와 다른 너를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동정과 공감의 차이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도, 당장 주변과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외유내강 스타일의 통렬한 영화였다.


영화제가 끝난 뒤 이 영화가 대상을 받은 것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 해금의 줄이 떨리듯 미세하게 요동치는 감정선과 벨비아 필름으로 찍은 사진 같은 미장센을 아끼는 사람이 이렇듯 많았을 줄이야. 부디 국내 다른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또 상영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B. 익스팬디드 시네마 - < 거대한 기묘함(The Grand Bizarre) >



[사진출처: 조디 맥, 런던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전주국제영화제는 주류와 비주류를 넘나들며 전주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는 영화제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주국제영화제가 개최 20주년을 맞아 실험영화 상영작 중 몇 편을 갤러리에서 볼 수 있도록 전시회를 열었다. 공식 명칭은 비(非) 극장 영상설치 프로그램 ‘익스팬디드 플러스(Expanded Plus)’. 10명의 영화감독이 프로젝션 및 설치 예술의 형태로 자신들의 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였다.


이번 글에선 조디 맥(Jodie MACK) 감독의 <거대한 기묘함>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는 사람 대신 수많은 옷감과 패턴 조각이 음악에 맞춰 연속적으로 세계 각지를 탐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60분의 영화상영 시간 동안 관객은 옷감과 옷감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거의 강제적으로 흡수한다. 그러다 중독성 있는 음악에 발맞춰 리듬을 타며 옷감에 새겨진 감각적인 무늬와 색감을 즐긴다. 그러다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반복되는 사운드와 패턴들이 한데 엮여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체 왜 재봉틀이 등장하는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나는 그 답을 팔복예술공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팔복예술공장에서는 영화 <거대한 기묘함>에 실제 쓰였던 옷감이 전시되어 있어 평면 스크린으로만 만났던 옷감을 직접 살펴보고, 만져볼 수 있다. 비슷한 듯 다른 옷감들이 한데 모이니 화려함이 더해진다. 실존하는 옷감들을 보니 다양한 삶의 방식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은 특별한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개인과 함께 ‘거대한 기묘함’의 구성원으로서 역사란 옷감을 짜고 있는 존재다.


실제로 조디 맥 감독은 영화 촬영을 위해 15개의 국가를 방문했으며, 각각의 특별함이 한데 섞여 만들어지는 세계에 대해 논하고 싶었다고 한다.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주어진 물체의 공식적 특수성은 그것이 복수형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움직이는지에 대한 더 큰 이미지에 기여하는 한 중요하다. 영화 자체에 대한 어떤 오래된 우화처럼, 모든 의미, 애니메이션,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삶도 복수에서 파생된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 외에도 영화에 쓰인 여러 요소의 조합이 주는 느낌은 다양하다. 덕분에 <거대한 기묘함>은 볼 때마다 새롭다. 구태여 정답과 교훈을 찾지 않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거대한 기묘함> 영화에 등장한 옷감과 패턴은 영화제 이후인 6월 16일까지 <익스팬디드 플러스:유토피안판톰>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하는 전시에서 볼 수 있었다. 전시는 끝났지만 영화의 도시 전주에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명동에서 20여분 거리에 위치한 팔복예술공장에 들러 전주국제영화제의 다양한 흔적을 찾아볼 것을 추천한다.




C. 선미촌의 작은 서점 ‘물결서사’


 

[사진출처 : 물결서사 페이스북]



여행을 할 때마다 근처 독립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는 습관이 있다. 구매한 책의 맨 앞 장에는 언제, 어디서 이 책을 구매했는지, 그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적어 둔다. 특히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운 지역에 가게 될 경우, 그 해 감상한 영화의 제목도 같이 적는다. 영화 속 세계관에 흠뻑 젖어든 이후 책을 읽으면 책이 영화와 아무리 연관 없는 내용이라도 두 예술 작품 사이를 잇는 감정의 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영화인의 맛집이라 불리는 춘천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묵었을 때, 지나가는 여행객이 나에게 ‘물결서사’에 꼭 가보라고 권했다. 마침 상영작과 연관된 책을 큐레이션 해놓던 <두권책방>이 없어져서 아쉬웠던 참이었다. 영화를 본 뒤 느낀 감정에 깊이를 더할 또 하나의 서점이 명동 근처에 생겼다는 소식이 반가웠고 난 이 서점에 방문하기로 했다. 


물결서사는 7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선미촌에 있는 낡은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서점이다. 물이 많은 마을이란 뜻의 물왕멀동, 중노송동의 옛 명칭을 따서 책방 이름에도 ‘물’을 넣었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아 책방 이름에 ‘서사’를 담았다. 책상에 놓인 빈티지 뱅커스 램프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공유 책방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헌 책에 둘러싸여 보물찾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우후죽순으로 생긴 독립서점들과는 달리 ‘물결서사’에는 특히 극본집이 많았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오래전 발간한 <10분 릴레이 희곡집>부터 대학로에서 활동 중인 젊은 희곡작가들의 작품을 펴낸 희곡전 세트 등 흥미로운 책들이 많았다. 또 전북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따로 큐레이션 되어 있었다. 


다음 영화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급하게 전북작가회의가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펴낸 테마 수필집 <천년의 허기>와 여름키스희곡전의 일부이자 영화 <미성년>의 원작인 <옥상 위 카우보이>를 구매했다. 뜨거운 태양과 대조되는 물결서사만의 서늘함이 기억에 남는다.









배우, 감독, 관객들로 붐비는 낮의 명동 거리,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좋은 카페와 음식점, 돔 근처에 가면 유독 넓고 맑은 하늘. 영화제에 대한 기억은 상영작 뿐 아니라 지역을 감도는 공기와 그날 아침 마시는 커피의 맛까지 모든 것을 포함한다. 가볍게 어깨를 스치는 거리의 행인들도 오랜 시간 기억 중 일부를 차지한다. 생각해보면 전주에서 유독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잘 가”라는 표현이다. 영화제 프로그램 북과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나에게 전주의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친절을 베푸는 것은 물론, 강요되지 않은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나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라는 그들의 환대는 특별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차창 밖에 드리운 여름의 녹음에 영화 속 주인공의 목소리와 단골 카페 사장님의 눈빛이 보인다. 내일 당장 일상과 책임감에 의해 지배당할 운명에 놓여있지만, 복귀하는 여정조차 괴롭지 않다. 내년에 영화제는 또 열릴 것이고, 그때 갈 곳이 있다는 건 마치 두 개의 심장이 한순간에 뛰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년 5월이 금세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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