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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OULive] 인왕산 기슭을 오르며


인왕산 기슭을 오르며


 박문국  에디터 지은경  사진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utyser)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라는 한국 고유의 화풍을 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존의 산수화가 중국의 명승지를 상상해서 그린 것에 불과했다면, 진경산수화는 우리의 강산을 직접 관찰하여 사실감 넘치게 화폭에 담아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 대한 사대에서 벗어나 우리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산수화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한 것이다. 


겸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왕제색도>는 진경산수화의 으뜸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익히 알려진 명산이 아닌 서울의 작은 야산인 인왕산을 그린 작품이 왜 그리 높이 평가받는지 의아할 수도 있으나 기암괴석과 암벽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인왕산을 직접 찾아가 보면 그 명성이 허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인왕산 곳곳에 숨겨진 명소를 찾아본다면 명화가 미처 전하지 못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내는 곳,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으로 떠나보자. 




복원되지 못한 문


인왕산 구간은 돈의문 터에서 시작된다. 서울의 4대문 중 하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현재는 문이 아닌 초라한 조형물만으로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세종 시절 현재 위치에 건립된 돈의문은 원래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제1간선도로의 시발점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문이다. 그러나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당시 총독부가 추진하던 경성 전차 궤도 복선화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돈의문은 철거되어 염덕기라는 자에게 헐값에 팔렸고 여러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복원작업이 요원한 상태다. 그나마 추진되던 복원 계획도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져 흐지부지되니 잊혀가는 돈의문의 기억이 애처롭다.





두 개의 기억, 경교장


인왕산 구간의 시작점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소는 바로 경교장이다. 해방 후 '백범 김구'의 사저로 이용되었던 경교장은 '이승만'의 이화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해방정국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김구가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던 만큼 경교장에는 통일 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의 노력은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당하며 물거품이 돼버렸다. 김구가 암살당한 2층 집무실은 현재 김구 피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놨는데 피 묻은 옷과 총알이 관통한 창문을 통해 역사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한편 김구의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잘 언급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원래 이 경교장은 친일 기업가 최창학의 소유였다. 본래 이름도 왜색이 짙은 죽첨장으로 일제강점기 당시만 하더라도 친일파의 호화저택으로 이름이 높았다. '최창학'이 소유하던 시절의 흔적은 2층의 다다미방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공간은 앞서 언급한 김구의 집무실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홍난파의 집


경교장을 등지고 본격적으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월암근린공원을 거치게 된다.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유적을 기반으로 새롭게 성벽을 쌓았는데 태조 시대에 처음 쌓은 돌과 세종, 순조 때 보수공사를 한 돌의 색이 확연히 달라 누구라도 쉽게 축성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성벽 뒤편으로는 가곡 <봉선화>,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로 유명한 '홍난파'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봉선화>는 3.1운동 직후 한국인이 느끼던 슬픔을 노래한 작품인데, 훗날 일제에 의해 투옥된 뒤 전향하여 친일행적을 남기고 끝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홍난파의 행보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홍난파의 집은 입구에 홍난파의 흉상이 자리해 알아보기 쉬운데 내부에는 홍난파가 작곡한 악보와 그가 사용했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동시에 이 집은 1930년대 서양식 주택의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기에 벽난로, 내리닫이 창 등 서양식 건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국사당과 선바위


인왕산의 구불구불한 성곽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나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성곽과 경복궁, 한옥마을 등의 전경을 느긋이 감상하며 이동할 때 더 큰 즐거움을 준다. 과거 조상들이 순행놀이를 왜 즐겼는지 조금이나마 그 기분을 알 법하다.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좁은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드문드문 등장하는 신목 사이로 국사당이 나타난다. 국사당은 한국 무속신앙의 전통을 간직한 공간이다. 단군, 이성계, 산신령, 칠성신 등을 모셔놓고 굿을 벌이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원래 국사당은 남산 정상에 위치해 있었는데, 1920년대 일제가 남산 기슭에 조선 신궁을 세우며 국사당을 더 낮은 현재의 위치로 이동시켰다. 




국사당 뒤편 계단을 오르면 기묘한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바위'라 부른다. 선바위에는 한양 천도 당시의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성벽을 쌓으려 하는데 태조의 스승인 무학대사와 조선을 실질적으로 설계한 정도전이 성벽을 선바위 안쪽으로 두느냐 바깥쪽으로 두느냐를 두고 논쟁했다. 숭유억불의 상징적 존재인 정도전은 불심을 형상화한 듯한 이 바위를 성 바깥에 두고 싶어 했고 무학대사는 반대로 성 안에 두고 싶어 했다. 결과적으로 정도전의 의견이 반영되어 한양도성은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남산으로 쭉 이어지게 축성되어 선바위는 성 바깥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이 일화는 불교의 쇠퇴가 가속화되던 후대에 창작된 것이겠으나 자연물과 사회현상을 연결하는 과거의 인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그 흔적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한양도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사당으로 향하는 인왕산 자락은 놀라움의 연속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과연 몇 명이 이곳을 와 봤을까? 소나무와 기괴한 모양의 바위들이 가파른 길을 끝없이 맞아준다. 국사당의 조금은 낯설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뒤로하고 한양도성의 계단길을 오르고 있노라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누가 이곳을 지났을까 하는 수많은 의문에 휩싸인다. 한참 계단을 오르면 뒤로 보이는 넓게 펼쳐진 서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더 계단을 오르자 서울은 그 모습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킨다. 늦은 오후나 초저녁에 이 길을 오르면 하나둘 불이 켜지는 서울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느끼고 또 감탄할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이런 신기한 장소를 품고 있다니, 서울은 정말로 놀라운 도시다.



Local to Seoul 

서울문화재단의 Local to Seoul 프로젝트는 서울 각각의 지역에 존재하는 문화와 정체성을 발굴하고, 새롭게 발견한 '로컬'을 바탕으로 '서울'의 정체성을 확장하려는 시도입니다. 동네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서울 X 문화]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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