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

2015년 말, 교과서에서 보던 시인들의 시집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했던 일을 기억하는가? 소와다리 출판사가 내놓은 1955년 윤동주 10주기 기념 증보판을 복간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와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의 초판본이 바로 그 화제의 주인공이었다. 표지, 내용, 세로쓰기까지 그대로 복간되었던 두 시집은 젊은 독자들 사이에서 큰 관심과 애정을 얻었다. 예상치 못한 역주행 열풍에 출판계에서는 초판 복각본 시집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 백석, 정지용 등 동시대 시인들의 시집은 물론 『무진기행』의 저자 김승옥의 수필집 복각본까지.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서 복각본 열풍이 퍼져 나갔다.

 

그로부터 5년여 지난 지금, 1930-40년대에 활동했던 화가와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이야기에 다시금 20~30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2021년 2월 4일부터 5월 30일까지 진행하는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관람하려는 젊은이들의 열기가 뜨겁다. 코로나-19로 인한 관람 인원 제한 탓에 사전 예약을 못 한 이들이 현장에 길게 줄을 서서 대기하기까지 한다. 코로나-19 이후 전시장 앞에 사람이 붐비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아 더욱더 낯설다. 더구나 전시의 주제는 데이비드 호크니와 같은 동시대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이의 초대전도 아니다. 국어 교과서, 미술 교과서에서 눈에 익도록 봐 온 이름들이기에 오히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거 작가들과 만남이다. 그럼에도 이 전시는 어떻게 사람들의 열렬한 관심을 끌어낸 걸까? 100년 가까이 떨어진 근대 작가들의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열광하게 만든 걸까?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포스터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의 주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번 전시는 1930~1940년대 경성이라는 시공간을 중심으로 문학과 예술에 헌신하며, 이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 내었던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프랑스의 에꼴 드 파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다방과 술집에 모여 앉아, 부조리한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 인식을 공유하며, 함께 지식의 전위를 부르짖은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 …… 한국 근대기 문학인과 미술인들이 함께 만들어 낸 소중한 자산들을 발굴하고 소개한 이번 전시를 통해, 비록 가난하고 모순으로 가득 찼던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귀족적이었던 예술가들의 멋진 신세계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소개 중 –

 

네 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전시회는 경성의 젊은 미술 작가와 문학 작가들 사이의 교류와 고민, 서로에게 끼친 영향 등을 통해 미술가와 문학가 사이가 매우 밀접하고 가까웠던 한 시절을 그려낸다. 이는 단순히 이들의 인간적인 교류나 서로의 작품에 끼친 영향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신문과 단행본 삽화로 함께 만든 작품 속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또는 작가로 더 유명한 이(시인 이상)가 즐겨 그린 그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는 뛰어난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화백 김환기 등)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을 보여주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나타난다.

<제1전시실, 전위와 융합>에 들어서면서 관람객은 조그마한 책 표지와 마주한다. 개벽사에서 발행한 대중잡지 『별건곤 제8권 7호』(1933)의 표지이다. 그림 속에는 2021년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영화관, 약국, 냉면집, 맥줏집 등이 자리한 골목 골목이 보인다. 왼편 절벽 한편에 마련된 자살장과 꼭대기에 위치한 교회에서 펄럭이는 천당이 가깝다라는 깃발에 관람객의 눈길이 머문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기쁨도 절망도 크게 다르지 않은 근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은 책 표지를 통해, 관람객은 이 낯설었던 시대에 공감의 거리가 확 가까워진 상태로 입장하게 된다.

 

포스터에서 보았던 흩뿌려진 이름들과 그 사이의 복잡한 연결선의 관계를 퍼즐처럼 맞춰나가듯,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이 경성의 종로에 열었던 다방 제비, 그리고 그 공간에 실뜨기처럼 엮여 모였던 예술가들의 작품 속으로 초대된다. 전시실 한쪽에서 가만히 흘러나오는 그 시절 다방 음악을 들으며 그때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하는 환상을 잠시 품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상, 박태원, 김기림, 구본웅의 시와 그림들에서부터 문인 조풍연의 결혼을 축하하며 당대의 미술가들이 함께한 <결혼 축하 화집>과 같은, 개인적이면서도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보자니 그들의 개인적인 삶에 관람객도 성큼 다가간 기분이다.

 

「향수」라는 전원적인 시로만 기억하는 정지용이 쓴 시 「카페 프란스」등을 접하니 교과서로만 접하던 이들의 그 시절 삶이 카페를 가고, 친구들을 만나며, 일상을 살아가는 현재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새로움을 추구하고,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 젊은 작가들의 모습이 우리 주변의 이들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또한 제1전시실에는 과거와 현재를 엮어 자신의 감상을 풀어낸 현대 예술가 이수경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의 소개 Ⓒ 직접 촬영
제2전시실의 풍경 Ⓒ 직접 촬영

고풍스러운 외국의 도서관을 떠올리게 하는 <제2전시실, 지상(紙上)>의 미술관으로 들어가 보자. 길게 늘어선 테이블 위에는 지금은 무척 낯설어진 종이 신문들이 놓여 있다. 신문 한쪽에는 연재소설과 삽화가 실려 있다. 그 시절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 끝없이 늘어 서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웹 소설이나 웹툰을 보며 머리를 식히거나 상상력을 키우며 현실을 잠시 잊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신문 연재소설은 큰 유희 거리였다.

 

이는 완성된 캔버스 속 화가의 그림이나 책에서 볼 수 있던 소설가와 시인의 글들이 당대 젊은이들의 일상 공간으로 찾아가는 형태였다. 미술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갑남을녀들도 그들이 신문지면 위에 펼쳐 놓은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공감했다. 더불어 이야기 한편에 그려진 삽화들은 이들의 공감과 상상력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시절 젊은이의 마음으로 한 편 한 편, 커다란 종이를 넘기며 따라 읽다 보면 이 옛 소설들의 재미에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익숙하지 않은 옛 문체들을 따라가느라 피로해진 눈을 들어 투명한 기둥들이 서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100부 한정판인 백석의 『사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 복각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화제의 시집 원본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전시장 한쪽에 관람객들이 잠시 앉아 있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이곳에 잠시 앉아 있다 보면 시와 음악이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어 한 구절 한 구절 정성 들여 읽는 낭독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와 같은 친숙한 시에서부터 신석정 시인의 <언제나 평온한 얼굴을 볼 수 있답니까?>처럼 조금은 낯선 시까지 다양한 근대 시를 감상할 수 있다. 헤드폰을 통해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낭독자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친숙하지 않았던 시 구절들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시인의 마음과 화가의 시선이 마음 한쪽에 좀 더 오래 자리 잡게 된다.

 

신문에 실린 연재소설과 삽화, 시집에 묶인 시와 표지 그림과 같은 문학인과 미술인들의 협업 작품들을 만끽한 후에는 그 과정에서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을지 궁금해질 것이다. 이들이 교류한 예술과 우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열띤 토론 등이 궁금해졌다면 한층 더 올라가 <제3전시실, 이인행각(二人行脚)>으로 자리를 옮겨보자. 제3전시실은 한 쌍의 문학인과 미술인이 주고받았던 예술적 하모니를 좀 더 입체적으로 드러냈다.

시를 듣고, 읽을 수 있는 좌석 Ⓒ 직접 촬영

시인 백석이 월북 이후에도 우정을 나눈 화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는 바로 제2전시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났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그림을 그린 정현웅이다. 시인 백석과 화가 정현웅의 인연과 우정은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시작되었다. 정현웅이 간결한 선으로 그린 백석의 옆모습은 단단하고 진지한 편집자로서의 백석의 모습을 조명하며, 백석이 정현웅에게 헌정한 시 「북방에서」는 가까운 친구에게 털어놓는 흉금 없는 마음의 소리를 담고 있다. 이들의 오랜 관계는 드러난 작품은 물론이고, 그 끝을 알지 못하는 인생의 뒤 여정에서도 이들의 삶과 함께 계속되었으리라 추측하게 만든다.

 

이외에도 일제 말기 문예 잡지 『문장』을 발간한 미술 평론가 이태준과 한국화가 김용준, 정지용과 장발, 김기림과 이여성의 교유와 이들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중섭, 구상, 이쾌대, 서정주, 조병화 등의 후대 시인과 화가들의 이야기와 작품들을 통해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또는 문학이 미술을 만났을 때 비로소 펼쳐지는 풍성한 상호작용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교류로부터 파생된 작품과 그 수혜가 현대의 관람객들에게 도달하기까지, 우주여행처럼 긴 항로를 이어나간 이 연결고리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벅차오른다.

제4전시실의 풍경 Ⓒ 직접 촬영
<모던 금강 만이천봉!> 표지: 황정수, 『별건곤』 제8권 제7호, 개벽사, 1933.7 Ⓒ 국립현대미술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풀기 어려운 비밀코드처럼 이야기를 담아내는 화가들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는가? 작품 외의 방식으로는 좀처럼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과묵한 미술가들의 삶이 궁금하기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반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찾아 읽는 것일 것이다. 마지막 전시인 <제4전시실, 화가의 글·그림>에서는 그림뿐 아니라 일기, 편지글, 수필 등을 부지런히 남긴 화가 김용준, 김환기, 박고석, 장욱진, 천경자, 한묵의 글과 그림을 통해 이 갈증을 해갈할 수 있다. 먼저 전시실 가운데 솟아 있는 네모반듯한 기둥을 돌아보다 보면 큐레이터가 엄선해 새긴 화가의 글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남긴 짧은 글귀들과 주변을 둘러싼 작품들을 감상하다 유난히 마음에 남는 화가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듯 글귀 기둥을 네모로 둘러싼 평평한 블록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 보라. 그러면 해당 섹션 화가의 글이 담긴 단행본 책을 발견할 수 있다. 한쪽에 다소곳이 꽂혀 있는 책과 화가의 그림을 번갈아 보면서 그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붓을 든 채 세상과 나에 대해 고민하던 사유의 깊이가 글로 펼쳐지는 것은 또 다른 층위로의 초대이다. 그들의 글이 담긴 책을 펼치는 순간, 다방 제비에 앉아 우정과 예술을 나누었던 그들의 대화 속에 함께 할 수 있다.

 

화가와 작가의 만남으로 풀어나갔던 미술과 문학의 만남은 이렇게 자신의 예술 세계 안에서 직접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렸던 작가들의 작품들로 마무리된다. 참새 방앗간처럼 기념품샵을 들려 마음에 든 그림엽서 몇 장과 김환기 화백의 책을 한 권 샀다. 과거의 그들과 나눈 두 세시간 남짓의 짧은 대화를 현재로 돌아와서도 좀 더 이어가고 싶어서.

<덕수궁미술관 정면 유리 원판 사진>(1938)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국립현대미술관

전시가 펼쳐지고 있는 공간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현대에 새로 세워진 건물이 아니다. 조선이 일제 치하에 있었던 1938년,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덕수궁 석조전 동관을 연결∙확장해 준공한 최초의 전문적인 근대 미술관이다. 이 전시장의 역사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의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시기와 그대로 겹쳐진다. 이에 관람객들은 관람 내내, 마치 시간여행을 떠나듯 근대의 풍경과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그 안에서 예술가들이 치열하게 이야기하고, 고민하며, 작품으로 만들어 낸 글과 그림들이 지금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공감하고, 위로받으며, 감응한다. 더없이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마치 르네상스처럼 새로운 문화가 폭발한 근대의 경성과 그 안에서의 젊은이들의 좌절과 고민이 폭발적인 과학 발전과 새로운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 청년들의 지금과도 닮았기에, 이들이 이 전시에서 80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깊이 공감하는 듯하다.

 

살아보지 못한 좋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밀레니얼 세대들을 자극하는 현상은 이미 여러 번 반복되어 온 일이다. 90년대 음악이 다시 들려오고, 유튜브에는 각 방송사의 옛 드라마를 편집한 다시 보기 영상이 올라온다. 을지로의 낡은 간판과 건물들 사이에는 새로운 세대의 감성이 더해져 힙지로라는 감각적인 별명이 생겼다. 어쩌면 인간답지 못할 정도로 너무 빠른 변화 속에서 벗어나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마음이, 그리고 그 과거 속에서 현재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삶의 균형을 찾으려 애쓰는 누군가와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 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인해 현실이 잠시 멈춘 듯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2020년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세계적인 전염병이 돌던 해가 이번만 있었으랴.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사랑하고, 다시 나아가던 밤. 예술가들이 자신의 역량을 의심하며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붓을 들던 밤은 근대에도,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때로는 과거의 것이 현재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며 그 사실이 위로가, 또는 영감이 되는 때가 있다. 당연한 줄 알았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조금 붕 뜬 매일을 살고 있는 요즘이 어쩌면 우리에게 이 전시를 관람하기 가장 좋은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봄이 왔고, 오래된 작품들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겨울 동안 품어 온 낡은 한숨을 떨치러 미술관으로 가자.